‘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柳重誠)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과 그 가족들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유항검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중성 마태오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다음은 그와 함께 갇혀 있던 사촌 형수 이순이(누갈다)가 옥중에서 쓴 편지 내용이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 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마태오와 그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마태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마태오가 사촌 형수 이순이와 함께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태오는 친척들과 유배지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들을 다시 잡아오도록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후 마태오는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다. 이에 따라 마태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당시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