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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특강, 신앙 안에서 역사적 예수 읽기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6-10-21 조회수 : 18

11월 5일부터 6주간 12강,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

우리가 알던 예수, 우리가 모르는 예수
사도신경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역사적 예수의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풍운아였습니다. 그분 머리에 기름을 부은 여인 정도가 그분을 살아생전에 알아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그분에 관해 깊이 묵상하고, 그분의 삶과 말씀의 의미를 알아듣기 시작했고, 급기야 그분을 '주님'이라 고백하게 된 것이지요. 그분을 알면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2천년 지난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서 예수님에 대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그분 이름은 익숙하고 내가 그분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신학자들은 그분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낯설게' 보라고 주문합니다. 어쩌면 그동안 우리가 그분을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정말 우리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지 다시 숙고해 버보라고 청합니다.     

대림절이 곧 다가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지만, 정작 내가 기다리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인지 모른다면 우리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성전'처럼 위태롭습니다. 그분이 참 하느님인줄은 알겠지만 그분이 참 사람인 이유를 캐묻고 싶습니다. 

민중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신앙고백 이전에 역사적 예수 사건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께서 십자가 사건을 부활 사건에 앞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리스도교 신앙은 민중과 더불어 예수님이 겪었던 고난과, 그 안에서 움트는 희망을 함께 노래합니다.

참혹한 세상에서 고단한 생애를 살아가는 사람들 앞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사목헌장> 1항에서 “기쁨과 희망(Gaudium et spes), 슬픔과 고뇌,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 참으로 인간적인 것은 무엇이든 신자들의 심금을 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행적과 말씀, 죽음과 부활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꼼꼼히 살펴보고,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을 두고 ‘주님’이라고 고백한 연유를 찾아가는 공부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그분의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2천년 전 팔레스타인에서 생생하게 살아계셨던 예수님의 낯선 얼굴을 마주 보며, 그분을 동무로 만나 동지로 삼고, 그분을 스승이요 주님으로 고백하기 위한 영적 여정이 될 것입니다.

◆ 강사: 한상봉 이시도로(가톨릭일꾼 편집장)
◆ 일정: 11월 5일~12월 17일까지 6주간 12강
           매주 목요일 오후 1시~5시(하루 2강씩)
           *11월 26일은 휴강입니다..
◆ 장소: 전주 치명자산성지 평화의 전당
◆ 강의 방법: 현장 강의 + 동영상 강의
          현장강의가 끝나고 이틀 후에 단톡방과 이메일을 통해 강의 동영상을 제공합니다.
          강의록 PPT + PDF + 음성파일 등 강의자료를 같은 날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 수강료: 현장강의/동영상강의 구분없이 18만원
              (가톨릭일꾼 프랜즈 12만원)              
              (입금계좌) 농협 352-1189-4554-13 한상봉(가톨릭일꾼)
◆ 수강신청(아래 주소 클릭해 신청서 작성)
               [https://docs.google.com/forms/역사적예수 수강신청]
◆  문의: 031-941-2736

◆ 강의 일정
    11/05    1강   [복음서와 예수] 알듯 모를 듯한 예수
               2강   [예수의 시대] 어둔 밤, 가혹한 희망

    11/12    3강   [예수와 성탄절] 그날 팔레스타인에서는?
               4강   [세례자 요한과 예수] 심판에서 자비까지

    11/19   5강   [예수와 갈릴래아] 광야에서 민중의 땅으로
              6강   [예수와 하느님 나라] 복음이 닿는 곳마다

    12/03   7강   [예수와 기적] 그들은 행복하다
              8강   [예수와 여성] 가난한 가운데 더 가난한

    12/10   9강   [예수와 땅 또는 권력] 하느님이 주님이시다
             10강   [예수와 율법] 율법과 성전을 넘어서

    12/17  11강   [예수와 십자가] 예수를 살해한 사람들
              12강   [예수의 부활]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

 

<신앙 안에서 역사적 예수 읽기 강의의 초점>

1강 [복음서와 예수] 알듯 모를 듯한 예수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기록이 아니라,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의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서에 가깝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형편과 이슈에 따라서 예수를 새롭고 설득력 있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서마다 예수에 대한 다른 기억들을 소환합니다. 그러나 복음서들이 공통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예수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이 공통의 기억을 토대로 예수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봅니다. 복음서는 예수를 ‘예언자’의 반열에 서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예언자들은 세상의 어떤 권위에도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에 기대어 진리를 선포합니다.

2강 [예수의 시대] 어둔 밤, 가혹한 희망

예수의 행적과 말씀을 이해하려면 그분이 사셨던 시대 상황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는 진공 속에서 무균질의 영적 교사로 오신 게 아닙니다. 구체적인 정치경제 종교문화 상황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 시대의 징표를 읽었던 분입니다. 다시 팔레스타인 인민들은 로마제국의 속주에 사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제국과 결탁한 성전세력과 율법 엘리트에 의해 참혹한 삶을 강요당하고, 죄인으로 몰리면서 ‘죽음이 그늘진 땅’에 살았습니다. 그 시대를 관통하는 사회적 불의와 심리종교적 억압과 불안 앞에서 예수의 예언자적 삶은 백성들에게 유일한 희망의 좌표가 되었습니다.

3강 [예수와 성탄절] 그날 팔레스타인에서는?

성탄절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가 누구였는지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고대인들은 영웅서사의 출발점에서 특별한 탄생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은 모세처럼 예수도 폭력적인 정치권력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지만 하느님께서 그이를 구하셨다고 말하고, 루카복음은 메시아가 가난한 이들 가운데 가장 가난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전합니다. 예수는 보잘것없는 시골처녀의 몸에서 태어나, 절박하게 구원을 바라는 사회적 약자들과 변방으로 떠밀려난 가난한 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그들을 위로하고 연대하며 구출합니다.


4강 [세례자 요한과 예수] 심판에서 자비까지

모든 복음서가 예수에 앞서 세례자 요한을 언급합니다. 예수가 요한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요한에게서 시작되었으나 예수에게서 완성된 복음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예수는 요한에게서 받은 영감을 광야에서 숙고합니다. 그리고 요한이 죽자 갈릴래아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요한은 ‘새하늘 새땅’을 위해 세례를 베풀었으나 예수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치유하면서 당신 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산상설교 등 말씀은 이런 구체적인 실천에 뒤따라옵니다.

5강 [예수와 갈릴래아] 광야에서 민중의 땅으로

예수는 평생 갈릴래아를 떠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생애의 마지막에야 예루살렘에 가셨다가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전합니다. 죽음이 그늘진 가난한 소작인들과 어부들의 땅이 갈릴래아입니다. 그러나 갈릴래아는 오히려 예수에게 생명의 땅이었고, 예루살렘은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은 힘써 제 노동으로 가족들을 돌보았으며, 예루살렘의 부재지주들은 정치경제종교의 중심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폭력과 비참을 선사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갈릴래아에서 만나자고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6강 [예수와 하느님 나라] 복음이 닿는 곳마다

예수가 선포한 복음의 핵심은 곧 ‘하느님 나라’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의 뜻은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는 것이며, 그날이 와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기를 희망하라고 주님의 기도에서 가르칩니다. 그 나라는 먼저 굶주리는 이들이 없고,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가는 사람이 없고, 사랑으로 죄를 넘어서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고상한 말이나 믿음으로만 얻어지지 않습니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들이 가져오는 나라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람이며, 그분의 아들과 딸이며, 예수가 ‘친구’라 불렀던 사람들입니다.


7강 [예수와 기적] 낫기를 원하느냐?

예수는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기 위하여 마술사처럼 계획적으로 치유행각을 벌이거나 빵 나눔의 기적을 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묻는 자에게만 대답을 들려주었던 것처럼, 당장 눈앞에서 병고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들에 대한 연민 때문에 치유하셨고, “낫기를 원하느냐?” 하는 질문처럼 그들의 믿음이 자신을 질병과 죄에서 해방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기적이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넘어설 때 발생합니다. 행복선언의 모든 이야기가 현실적 불행을 영적 행복으로 넘어서는 기적입니다.

8강 [예수와 여성] 그대와 말하고 싶다

예수는 세상의 아버지를 버리고 영적 어머니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분 주위에는 여성들이 많았고, 유다교의 일반적 관행과 다르게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기뻐했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여인과 생명의 말씀을 건네주고, 베타니아에서 마리아와 대화를 나누고, 심지어 골고타로 가는 길목에서도 여성들과 만납니다. 복음서는 남성 제자들이 다 떠난 십자가 아래에 그 여인들이 남아있었다고 전합니다. 그 시대에 가장 소외받던 여성들이 정말 이해받지 못하고 외로웠을 예수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9강 [예수와 땅 또는 권력] 하느님이 주님이시다

이스라엘에서 땅은 하느님의 소유입니다. 하느님은 농민들에게 그 당을 경작하게 하였으니, 예수시대에 지주란 하느님과 농민 사이에 끼어든 착취자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리라는 말씀은 농민에게 땅이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는 빼앗긴 토지와 권력을 농민에게 되돌려 주는 희년운동이며 회개운동입니다. 예수는 그 땅에 주저앉아 글씨를 쓰면서 간음한 여인을 해방시켰고, 그 흙을 개어 눈먼 자를 고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의 해방과 구원사업은 ‘땅의 구원’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10강 [예수와 율법] 율법과 성전을 넘어서

예수의 복음은 율법과 성전이 끝나는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번제물보다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라고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고, 의인과 죄인을 가르는 율법이 아니라 무고한 이들을 살리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율법을 바라셨습니다. 예수시대에 정결법과 안식일법과 성전제의는 대다수 민중을 죄인으로 만들고, 소수 종교엘리트만 의인으로 남게 했으니, 예수는 한사코 그 법을 어기시고 대사제와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과 지주들의 미움을 샀습니다. 예수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시고, 가련한 이들의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11강 [예수와 십자가] 예수의 수난과 죽음

예수운동은 일단 실패했습니다.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체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그 몸은 십자가 위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노예와 강도처럼 저주받은 모습으로 예수가 수난을 당하고 죽어갈 때, 겟세마니에서 골고타에 이르는 길에서 하느님은 침묵하고, 이 무신론적 상황에서 제자들은 도망가고, 적대자들은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죽음을 기억하고, 거기서 의미를 찾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현대신학자들은 예수가 고통받을 때 하느님도 진통을 느끼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어찌보면 신앙인이란 슬픔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통증에서 구원이 시작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12강 [예수와 빈무덤] 하느님의 새로운 현존

복음서에서 예수의 부활을 확증하는 근거는 두 가지입니다. 빈무덤과 부활하신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경험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시신이 사라지자 그분의 죽음을 믿어야 할지 아직 살아계시는 것은 아닌지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죽어도 살아계신 분으로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죽었지만 제자들 곁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계시는 것으로 경험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시 일어난” 예수는 그분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만 나타났고, 생전에 그분과 교제하지 않았던 군중들이나 그분을 처형한 빌라도나 가야파는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처럼 살 때, 우리는 우리 삶 어디서나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느님은 우리 곁에 새삼스럽게 현존하십니다.

출처 : 가톨릭일꾼(http://www.catholicworker.kr)